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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0대 사건·사고 97화 제품이 사람을 죽였다 — 가습기 살균제와 소비자 권리 운동 본문

2011년 봄, 산부인과 중환자실에 이상한 환자들이 실려 왔다
서울 아산병원 중환자실이었습니다. 임신부들이 원인 모를 폐 손상으로 줄줄이 입원했습니다. 의료진은 당혹스러웠습니다. 비슷한 증상이 반복되었고, 환자들 사이에 뚜렷한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역학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공통점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환자들 대부분이 집 안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살균제의 성분이 폐 깊숙이 침투해 조직을 파괴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그로부터 몇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 몇 달 사이에도 제품은 계속 팔리고 있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는 어떻게 시장에 나왔나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 유공이라는 기업이 처음 출시했습니다. 가습기 안에 번식하는 세균과 곰팡이를 막는다는 취지였습니다. 이후 옥시레킷벤키저, 롯데마트, 홈플러스, 이마트, SK케미칼 등 수십 개 브랜드가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2011년까지 약 600만 개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문제는 제품에 사용된 화학 성분, 특히 PHMG와 PGH가 흡입 독성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시판 전에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먹거나 피부에 닿는 것이 아니라 미세 입자로 공기 중에 퍼져 폐로 흡입되는 방식의 독성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국내에 없었습니다. 검증의 공백이 제품이 되어 가정으로 들어갔습니다.
피해 규모는 얼마나 되었나
2011년 정부가 수거 명령을 내리고 판매를 중단시켰지만 이미 피해는 광범위하게 발생한 뒤였습니다. 정부 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 관련 피해 신고자는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이 가운데 사망자는 수백 명을 넘었습니다. 임신부와 영유아, 노인처럼 면역이 취약한 집단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살균제를 가장 오래, 가장 자주 사용한 사람일수록 피해가 컸습니다. 겨울철 밀폐된 방 안에서 아이 곁에 틀어놓던 기계가 독성 물질을 뿜고 있었습니다. 가정이라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피해가 일어났습니다.
집 안에서, 가족을 위해 켜놓은 기계가 폐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기업은 무엇을 알고 있었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사회적으로 알려진 이후 기업들의 대응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옥시레킷벤키저는 제품의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해 외부 연구기관에 용역을 맡겼으나, 자사에 불리한 연구 결과를 은폐하거나 연구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검찰 수사 결과 일부 기업 임원들이 유해성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은폐했다는 혐의가 확인되었습니다. 기업이 소비자의 안전보다 판매 실적을 우선했다는 판단이 법정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옥시 전 대표가 구속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처벌 수위가 피해 규모에 비해 턱없이 낮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정부는 왜 막지 못했나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가 수백만 개 팔리는 동안 정부 기관은 이 제품의 흡입 독성을 사전에 점검하지 않았습니다. 살균제는 의약품이 아닌 생활용품으로 분류되어 상대적으로 완화된 기준이 적용되었습니다. 환경부와 보건복지부 사이에 관할 영역이 모호했고, 부처 간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피해 신고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정부의 대응은 늦었습니다. 제품 수거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피해가 알려진 시점으로부터 수개월이 걸렸습니다. 사후 대응은 물론이고 사전 예방 체계 자체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은 어떻게 싸웠나
피해자 가족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혼자서는 기업과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도 고통이었습니다. 의료 기록과 제품 사용 증거를 개인이 직접 모아야 했습니다. 집단 소송이 시작되었고, 국회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피해자들이 청문회장에서 직접 증언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그 장면들이 방송을 통해 퍼지면서 여론이 움직였습니다. 개인의 비극이 사회적 의제가 되는 과정에는 피해자들의 지치지 않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제도는 어떻게 바뀌었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한국 소비자 안전 제도의 허점을 정면으로 드러냈습니다. 이후 생활화학제품 안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살생물제, 즉 세균과 곰팡이를 죽이는 성분이 들어간 제품에 대한 사전 심사가 의무화되었습니다. 흡입 독성 평가 기준이 새로 마련되었습니다.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도 제정되어 정부가 피해자 지원에 직접 나서는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제도 변화의 폭은 컸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과 지원이 충분히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소비자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남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매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은 안전하다는 전제 위에서 소비자는 선택을 합니다. 그 전제가 무너졌습니다. 인증 마크와 광고 문구를 믿었던 사람들이 폐 손상을 입었습니다. 성분표를 읽어도 위험 여부를 알 수 없었고, 알아야 할 책임이 소비자에게 있지도 않았습니다. 기업이 안전을 증명하고, 정부가 그것을 검증하는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소비자는 스스로를 지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수백 명의 죽음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질문은 남는다
생활용품의 안전성을 검증할 책임은 기업에게 있는가, 정부에게 있는가, 소비자에게 있는가. 기업이 유해성을 알고도 은폐했을 때 처벌은 충분했는가.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구조는 공정한가.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안전이 당연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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