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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onsoul's blog

대한민국 100대 사건·사고 94화 골목은 누구의 것인가 — 젠트리피케이션과 을지로 살리기 운동 본문

역사 & 현대 사회/대한민국 근현대사

대한민국 100대 사건·사고 94화 골목은 누구의 것인가 — 젠트리피케이션과 을지로 살리기 운동

raon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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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목의 이완된 분위기

2018년 봄, 철거 예고 딱지가 붙었다

서울 을지로 3가 골목 안쪽이었습니다. 인쇄소와 조명 가게, 철물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에 어느 날 빨간 딱지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재개발 구역 지정을 알리는 공고였습니다. 몇십 년씩 그 자리를 지켜온 가게 주인들은 처음에는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건물주에게 명도 소송이 제기되었고, 이주 기한이 통보되었습니다. 을지로 골목이 사라진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곳을 찾던 예술가들과 청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단순히 낡은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을지로는 어떤 곳이었나 — 도심 제조업의 마지막 거점

을지로 일대는 1960년대부터 인쇄, 조명, 공구, 철재 가공업이 밀집한 도심 제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대형 공장이 아니었습니다. 열 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장인 한두 명이 수십 년간 같은 기술을 다듬어온 공간들이었습니다. 특수 인쇄, 수제 간판, 맞춤 금속 가공처럼 대량 생산 체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기술들이 이 골목에 살아 있었습니다. 영화 소품부터 건축 자재까지 서울 곳곳의 제작 현장이 을지로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도시의 기반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왜 을지로로 몰렸나

2010년대 중반부터 을지로 골목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낡고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 작은 카페와 바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열었습니다. 오래된 네온사인과 공업 도구들이 늘어선 골목을 젊은 사진작가들이 카메라로 담았습니다. 을지로는 힙하다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분위기가 그 자체로 매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이고 주목받기 시작하자 땅값이 올랐습니다. 임대료가 뛰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오래된 것들이 밀려나는 역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오래된 것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오래된 것들을 밀어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어떻게 작동했나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된 지역이 개발되면서 기존 거주자와 상인이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을지로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홍대 앞 골목, 이태원 경리단길, 성수동, 망원동이 차례로 같은 과정을 겪었습니다. 독립 카페와 개성 있는 가게들이 지역의 분위기를 만들고, 그 분위기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임대료가 오르고, 원래 그 분위기를 만들었던 가게들이 쫓겨나는 순환이었습니다. 개발의 과실은 건물주와 투자자에게 돌아갔습니다. 분위기를 만든 사람들은 다른 골목으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정겨운 작업실의 손길

을지로 살리기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재개발 예정 구역 지정 이후 을지로를 터전으로 삼아온 작가들과 공예가들, 단골 손님들이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을지로 보존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이 시작되었고, 골목 곳곳에서 전시와 공연이 열렸습니다. 가게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노인 장인들의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퍼지면서 공감대가 넓어졌습니다. 문화계 인사들이 지지 발언을 냈고, 언론이 주목했습니다. 서울시도 움직였습니다. 도시재생의 관점에서 을지로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논의가 행정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완전한 철거 계획은 수정되었고, 일부 구역에 대한 보존 방안이 검토되기 시작했습니다.

소상공인과 예술가는 같은 편이었나

을지로 운동 안에도 균열이 없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간 가게를 운영해온 장인들과, 그 분위기를 즐기러 온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는 출발점이 달랐습니다. 장인들에게 을지로는 생계였고, 예술가들에게는 영감의 공간이었습니다. 보존 운동이 오히려 골목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 임대료 상승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아이러니한 지적도 나왔습니다. 보존의 방향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운동 내부에서도 쉽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도시 재생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가렸나

을지로 논쟁은 도시 재생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보게 만들었습니다. 재생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낡고 죽어가는 것을 살려낸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재생의 과정에서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밀려난다면 누구를 위한 재생인가라는 물음이 남습니다. 멋진 카페와 갤러리가 들어선 골목은 보기에 달라졌지만, 그곳에서 평생 일해온 사람들의 자리는 사라졌습니다. 도시는 더 아름다워졌는데 더 불평등해지는 현상이 을지로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을지로는 지금 어디에 있나

논쟁과 운동이 이어지면서 을지로 일부 구역은 전면 철거를 면했습니다. 서울시는 도심 제조업 보존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미 떠난 가게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장인들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을지로 골목에는 오래된 조명 가게 옆에 감각적인 카페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공존처럼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그 안의 균형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골목은 남았지만 그 골목을 만든 사람들은 절반쯤 사라진 뒤였습니다.


질문은 남는다

도시의 오래된 것들은 누가 지킬 책임이 있는가. 젠트리피케이션을 막는 것과 도시를 개발하는 것은 동시에 가능한가. 분위기를 만든 사람과 그 분위기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다를 때 공정한 분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존 운동이 오히려 보존하려는 것을 위협할 수 있는가. 골목은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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