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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0대 사건·사고 52화 인혁당 사건 (1974-1975) 본문

역사 & 현대 사회/대한민국 근현대사

대한민국 100대 사건·사고 52화 인혁당 사건 (1974-1975)

raon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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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법정과 부서진 망치

1975년 4월 9일 새벽 서울구치소에서는

1975년 4월 9일 새벽 5시 서울 서대문구 서울구치소. 8명의 사형수가 형장으로 끌려갔다. 전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됐다. 18시간 만의 집행이었다. 가족에게 연락할 시간도 없었다.

도예종, 여정남,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하재완, 서도원, 김용원이었다. 나이는 31세에서 48세였다. 교사, 목사, 시인, 언론인이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를 조직했다는 혐의였다.

오전 8시 가족들에게 통보가 갔다. 이미 사형이 집행됐다고 했다. 시신을 인수하라고 했다. 유족들이 구치소로 달려갔다. 차가워진 시신과 마주했다.


인혁당 사건은 어떻게 시작됐나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이 있었다. 간첩과 관련됐다는 혐의로 40여 명이 구속됐다. 재판 결과 일부는 무죄, 일부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실체가 불분명한 사건이었다.

1974년 4월 유신 체제가 흔들렸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중앙정보부가 수사에 나섰다. 학생 운동 배후를 찾는다고 했다. 인혁당이 배후 조종했다고 발표했다. 1964년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연행했다.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누가 연행됐나

도예종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 교사였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노동 운동을 지원했다. 여정남은 목사였다. 도시 빈민 선교를 했다. 송상진은 시인이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이수병은 언론인이었다. 유신 비판 기사를 썼다. 우홍선은 인권 운동가였다. 하재완은 대학 강사였다. 서도원은 출판사를 운영했다. 김용원은 회사원이었다.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같은 모임에 참석했다. 사회 문제를 토론했다. 민주화를 논의했다. 폭력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앙정보부는 이것을 조직 활동이라고 했다.


고문은 어떻게 자행됐나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조사실. 도예종이 끌려왔다.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조직했다고 자백하라고 했다. 아니라고 했다. 물고문이 시작됐다. 물통에 머리를 담갔다. 숨이 막혔다.

전기고문을 당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에 전선을 연결했다. 전류를 흘렀다. 몸이 경련했다. 의식을 잃었다. 물을 끼얹었다. 깨어나면 다시 물었다. 인혁당을 만들었냐고.

사흘 밤낮을 고문당했다. 견딜 수 없었다. 시키는 대로 진술서에 서명했다.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북한과 연계됐다고. 폭력 혁명을 준비했다고. 모두 거짓이었다.


1970년대 희생자들 영정 사진

재판은 어떻게 진행됐나

1974년 7월 서울지방법원. 인혁당 재건위 사건 1심 재판이 시작됐다. 피고인들이 법정에 섰다. 고문 사실을 호소했다. 자백이 강요됐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묵살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연계됐다고 했다. 증거는 자백뿐이었다. 물증은 없었다. 조직 활동 증거도 없었다. 자백만으로 재판이 진행됐다.

변호인들이 반박했다.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했다. 인혁당 재건위 실체가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듣지 않았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했다. 다음 날 새벽 사형이 집행됐다.


가족들은 무엇을 겪었나

도예종의 아내 이부영은 남편을 면회했다. 고문 흔적이 역력했다. 손톱이 뽑혀 있었다. 다리를 절었다. 억울하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형 선고 후에도 희망을 가졌다. 재심에서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믿었다. 변호인들도 그렇게 말했다. 1975년 4월 9일 아침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사형당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구치소로 달려갔다. 시신과 대면했다. 남편의 몸은 차가웠다. 아이들이 물었다. 아빠는 언제 오냐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감시를 받았다.


진실은 언제 드러났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확대됐다. 인혁당 사건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국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증거를 제시했다.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1988년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인혁당 사건이 다뤄졌다.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이 증언했다. 고문 사실을 인정했다. 조작 정황이 드러났다.

2005년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이 재심을 개시했다. 2년간 재판이 진행됐다. 검찰이 무죄 의견을 냈다. 증거가 모두 조작됐다고 인정했다.


법원은 무엇을 판단했나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 1심 선고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었다. 피고인 전원 무죄. 인혁당 재건위는 실체가 없었다. 모든 증거가 조작됐다.

자백은 고문으로 강요됐다. 조직 활동 증거가 없다. 북한과 연계 증거도 없다. 국가가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사법 살인이었다.

판결문에는 사과가 담겼다. 사법부가 국가 폭력에 동조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시켰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법원이 공식 사과했다.


2024년 한 유족의 이야기는

2024년 3월 서울 종로구 한 카페. 도예종의 아들이 인터뷰에 응했다. 60대가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를 기억한다. 책을 많이 읽었다.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집에 군인들이 왔다. 아버지를 데려갔다. 다시는 살아서 보지 못했다.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49년이 지났다. 국가가 사과했지만 상처는 남았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국가 권력이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질문은 남는다

국가가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았다. 법원은 이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18시간 만에 집행했다. 8명이 억울하게 죽었다.

사법부는 왜 국가 폭력에 동조했나. 권력의 명령 앞에서 법은 무력했는가.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빼앗은 책임은 누가 지는가. 49년이 지나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국가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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