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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0대 사건·사고 76화 88만원 세대, 청년은 왜 가난해졌나 본문

2007년 여름, 책 한 권이 청년들의 이름을 불렀다
2007년 여름, 경제학자 우석훈과 저널리스트 박권일이 쓴 책 한 권이 서점에 놓였습니다. 제목은 88만원 세대였습니다. 당시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 원에 20대 비정규직 평균 임금 비율을 곱해 산출한 숫자였습니다. 책은 출간 즉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독자들은 계산식이 아니라 자신의 통장 잔액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청년 세대의 경제적 현실에 이름이 붙은 순간이었습니다. 이름이 붙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 세대가 만들어졌나 — 외환위기 이후의 노동시장 재편
88만원 세대는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뿌린 씨앗이 10년에 걸쳐 자란 결과였습니다. 위기 이후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명목 아래 비정규직 제도가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정규직 일자리는 줄었고, 새로 생기는 일자리 상당수는 계약직과 파견직이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전체 임금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35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이 구조 속으로 처음 노동시장에 진입한 세대가 바로 2000년대의 20대였습니다. 이전 세대가 겪었던 고도성장의 과실은 이미 분배가 끝난 뒤였고, 이들 앞에 남은 것은 좁아진 문과 낮아진 임금이었습니다.
스펙 경쟁은 왜 시작되었나
일자리가 줄자 경쟁이 격화되었습니다. 대학 졸업장은 기본이 되었고, 그 위에 토익 점수와 자격증과 인턴 경험과 공모전 수상 이력이 쌓였습니다. 스펙이라는 단어가 일상어로 자리를 잡은 것이 이 시기였습니다.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대학 졸업을 미뤘습니다. 졸업 후 바로 취업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학생 신분을 유지하면서 스펙을 쌓는 시간을 버는 방식이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펙을 쌓는 데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개인과 가정이 부담했습니다. 경쟁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계급의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노력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노력할 기회가 공평하지 않았다.

88만원은 숫자가 아니었다 — 청년 비정규직의 일상
88만원으로 서울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계산해보면 금방 드러났습니다. 고시원 월세 30만 원대, 식비 하루 1만 원 잡으면 한 달 30만 원, 교통비와 통신비를 합치면 이미 한계였습니다. 저축은 불가능했고 의료비나 경조사비 같은 돌발 지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비정규직은 4대 보험 적용도 불완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치거나 아프면 그대로 소득이 끊겼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내일을 설계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부지런함이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였습니다.
세대론은 무엇을 설명했고 무엇을 가렸나
88만원 세대라는 프레임은 청년 문제를 사회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개인의 실패로 여겨지던 것들이 구조의 문제로 재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대론은 동시에 한계를 품고 있었습니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격차는 극심했습니다. 부유한 가정의 20대와 저소득 가정의 20대가 같은 세대로 묶이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세대 갈등 담론이 강화되면서 계급과 자산의 불평등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세대 간 대립의 그늘에 가려지는 부작용도 나타났습니다. 이름 붙이기는 가시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단순화의 위험을 품습니다.
사회는 어떻게 반응했나
책이 출간된 이후 청년 문제는 정치권의 언어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청년 일자리, 청년 주거, 청년 창업이 정책 의제로 등장했습니다. 정부는 청년인턴 프로그램과 중소기업 취업 장려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인턴은 정규직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의 임금 격차와 복지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구조는 그대로인 채 대증 처방만 반복되었다는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청년은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수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88만원 세대 이후 무엇이 왔나
88만원 세대론이 등장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사이 헬조선, N포세대, 이생망이라는 단어들이 차례로 등장했습니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에서 시작해 집과 인간관계와 꿈까지 포기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포기의 목록은 늘어났고, 이름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달라진 이름들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88만원이라는 숫자는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그 숫자가 가리키던 현실은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되었습니다.
질문은 남는다
청년 빈곤은 개인의 선택 문제인가, 구조의 결과인가. 스펙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공정해지는가, 불공평해지는가. 세대론은 문제를 드러내는가, 가리는가. 청년 정책은 왜 반복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가. 포기의 목록이 늘어가는 사회에서 희망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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