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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0대 사건사고 10화: 노태우 3당 합당 "민주화의 열매를 가로챈 정치 공학" 본문

1990년 1월 22일 오전, 청와대.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종필이 악수를 나눴습니다.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세 당이 하나로 합쳤습니다. "민주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순식간에 국회 의석 218석을 차지한 거대 여당이 탄생했습니다.
불과 2년 전, 김영삼은 독재에 맞서 싸우던 민주화 투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군사 정권의 후계자와 손을 잡았습니다. 국민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6월 항쟁이 무엇이었나. 박종철과 이한열이 왜 죽었나." 민주화의 열매가 정치인들의 야합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1987년 대선, 분열된 야권
198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첫 시험대였습니다. 국민들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이제 군사 정권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야권은 분열했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거목이 모두 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재야는 "단일화하라"고 외쳤지만 두 사람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표가 쪼개졌습니다.
개표 결과,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0%. 노태우가 당선되었습니다. 만약 김영삼과 김대중 중 한 명만 나왔다면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야권 득표율을 합치면 55%였으니까요. 국민들은 허탈했습니다. "6월 항쟁으로 뭘 얻었나. 결국 군사 정권이 계속되는데."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자 야당을 만들었습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야권은 둘로 쪼개진 채 여소야대 국회를 맞이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법안 하나 통과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광주 청문회, 노태우를 궁지로
1988년,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밝히는 자리였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어떻게 광주를 학살했는지 낱낱이 파헤쳐졌습니다. 국민들은 TV 중계를 보며 분노했습니다.
노태우는 점점 궁지에 몰렸습니다. "12·12 군사 반란의 핵심 인물", "광주 학살의 공범". 재판에 넘겨져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야당은 "노태우 퇴진"을 외쳤습니다. 거리에서는 다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1989년, 정국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국회에서는 여야가 대치했습니다. 법안은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경제는 어려워졌습니다. 노태우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임기를 제대로 채울 수 없다."
노태우의 참모들이 묘안을 냈습니다. "야당을 흡수하는 겁니다. 김영삼이나 김종필을 끌어들이면 국회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노태우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해보자."
김영삼의 선택, 그리고 충격
비밀 접촉이 시작되었습니다. 노태우 측은 김영삼과 김종필에게 제안했습니다. "함께 합시다. 다음 대선에서 YS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김영삼은 고민했습니다. 평생 독재에 맞서 싸웠는데, 이제 그들과 손을 잡는다고?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1987년 대선 패배의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김대중과 경쟁하면 또 질 수도 있다. 차라리 노태우와 손잡고 집권하는 게 낫지 않을까." 김영삼은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1월 22일, 폭탄 선언이 터졌습니다.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이 합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YS가 DJ와 대통령 되겠다고 노태우와 손잡았다고?" 충격이었습니다.
합당 발표 직후, 김영삼은 해명했습니다. "민주 대연합입니다. 지역 갈등을 해소하고 안정된 정국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변명이다. 권력욕 때문이다."
민주화 세력의 분열
합당 소식에 가장 충격받은 사람은 김대중이었습니다. 평생의 동지였던 김영삼이 적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배신이다." 김대중은 분노했습니다. 평민당 의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만 야당에 남았다."
민주화 운동 세력도 갈라졌습니다. 일부는 김영삼을 따라 민자당으로 갔습니다. "YS가 집권하면 민주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등을 돌렸습니다. "배신자", "변절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대학가는 들끓었습니다. "3당 합당 분쇄!", "YS 규탄!"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1987년 6월의 함성은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피곤했습니다. "또 시위냐. 정치인들 싸움에 우리가 왜."
김영삼은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습니다. 김종필도 최고위원이 되었습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이른바 "3김 시대"가 한 지붕 아래 모인 기묘한 풍경이었습니다. 218석의 거대 여당이 탄생했습니다. 야당인 평민당은 고작 70석. 국회는 완전히 여당 천지가 되었습니다.

정치 공학이 남긴 상처
3당 합당은 단기적으로 성공했습니다. 노태우는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이 당선되어 32년 만에 문민정부가 들어섰습니다. "3당 합당 덕분에 YS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첫째, 민주화 세력이 분열했습니다. 6월 항쟁을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적이 되었습니다. 민주당 계열은 영원히 두 갈래로 쪼개졌습니다. 그 상처는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둘째, 지역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영남(김영삼)과 충청(김종필)이 손잡고, 호남(김대중)을 고립시켰습니다. 지역주의 정치가 극에 달했습니다. 호남은 "버림받았다"는 피해의식이 깊어졌고, 영남은 "우리가 주도한다"는 오만함이 커졌습니다.
셋째, 정치 불신이 깊어졌습니다. "정치인은 다 똑같다", "결국 권력이 목적이다". 국민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6월 항쟁으로 높아졌던 정치 참여 열기가 식어버렸습니다.
권력을 위한 선택, 그 후유증
김영삼은 1993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재판에 넘겨 감옥에 보냈습니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어느 정도 민주화를 진전시켰습니다. "3당 합당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가혹합니다. 2020년, 한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적 사건"을 묻자 3당 합당이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민주화를 배신한 야합", "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킨 원죄". 30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김영삼 본인도 말년에 후회했습니다. "3당 합당이 최선이었는지 모르겠다. 다르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정치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3당 합당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정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권력을 잡는 것이 목적인가, 아니면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목적인가. 명분과 실리, 원칙과 타협.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가.
김영삼은 "집권해야 민주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노태우와 손잡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나름의 개혁을 했습니다. 하지만 과정에서 잃은 것도 많았습니다. 동지들의 신뢰, 국민들의 지지, 민주화 운동의 순수성.
정치는 현실입니다. 타협과 연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켜야 할 선도 있습니다. 박종철과 이한열이 피 흘린 지 2년 만에 그들을 죽인 세력과 손잡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상상해봅니다. 만약 김영삼이 3당 합당을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야권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지역주의가 이렇게까지 심화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3당 합당은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지역주의, 정치 불신, 민주 진영의 분열. 그 모든 것의 뿌리에 1990년 1월 22일이 있습니다.
다음 화 예고: 북풍 공작 의혹 -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안보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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