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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0대 사건사고 - 7화: 부마 항쟁 "유신의 심장을 멈춘 시민들의 함성" 본문

1979년 10월 16일, 부산 시내에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외침이 도심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틀 후인 18일, 마산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거리로 나왔습니다. 택시 기사, 노점상, 공장 노동자들이 함께 외쳤습니다.
부마 항쟁.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유신 독재에 맞서 일으킨 민주화 운동입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탱크가 시내로 들어왔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함성은 8일 후 궁정동 안가의 총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종말, 그 시작이 바로 부마 항쟁이었습니다.
왜 부산과 마산이었나
1979년, 대한민국은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2차 오일 쇼크로 물가가 치솟았고, 수출이 줄어들었습니다.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고,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김경숙 씨가 사망했습니다.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8월, 야당 총재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미국이 박정희를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격노한 박정희는 10월 4일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켰습니다. 야당 총재를 의원직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의회 민주주의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은 부산이었습니다. 부산 시민들은 "우리가 뽑은 국회의원을 왜 쫓아내느냐"며 분노했습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먼저 움직였습니다. 10월 15일, 부산대 학생 5천여 명이 교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16일에는 동아대,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학생들도 합류했습니다.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다
처음에는 학생 시위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의 과잉 진압이 시민들을 자극했습니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곤봉이 휘둘러지고, 학생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시민들이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16일 저녁, 부산 시내는 완전히 시위대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남포동, 광복동, 국제시장.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메웠습니다. 택시 수백 대가 경적을 울리며 시위를 지원했습니다. 노점상들은 시위대에게 음료수를 나눠줬습니다.
시위대는 파출소와 방송국을 습격했습니다. 유신을 찬양하던 언론기관들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MBC 부산 방송국이 불탔습니다. 세무서와 구청도 공격받았습니다. "유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이 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정부는 당황했습니다. 부산에 위수령을 발동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더 강력한 카드를 꺼냈습니다. 10월 18일 오전 0시, 부산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군대가 투입되고, 탱크가 거리로 들어왔습니다.
마산, 더 격렬하게 타오르다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자, 이번에는 마산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10월 18일, 경남대와 마산대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마산 시민들의 반응은 부산보다 더 뜨거웠습니다. 마산은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의거가 일어났던 곳입니다. 19년 전 김주열 학생의 주검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던 그곳이었습니다.
마산 시위는 더 격렬했습니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불태웠습니다. 파출소 11곳이 습격당했습니다. 시청과 세무서도 공격받았습니다. 마산 시내 전체가 전쟁터처럼 변했습니다.
정부는 결국 마산에도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계엄군이 들어오고, 시내에 탱크가 배치되었습니다. 총과 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검을 겨눴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좋다. 유신만 끝나면." 그런 각오였습니다.

유신의 마지막 발악
박정희는 10월 20일 부산과 마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위수령보다 더 강력한 조치였습니다.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졌고, 집회는 완전히 금지되었습니다. 영장 없는 체포가 가능해졌습니다.
군인들은 무차별 체포에 나섰습니다. 거리에 있는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습니다. 대학생, 고등학생, 공장 노동자, 심지어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3일 동안 체포된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정부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난동이 아니라 정당한 저항이라는 것을. 7년간 짓눌려 살아온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는 것을.
8일 후 울린 총성
부마 항쟁은 10월 20일 계엄령으로 일단 진압되었습니다. 거리는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하지만 유신 체제는 이미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부산과 마산에서 시작된 시민 봉기가 전국으로 번질 수 있다는 공포가 청와대를 엄습했습니다.
박정희와 측근들은 대책 회의를 거듭했습니다. 강경파는 더 강한 탄압을 주장했습니다. 온건파는 유화책을 제시했습니다. 회의는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그리고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저녁 7시 40분경, 총성이 울렸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것입니다. 18년 독재가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김재규는 후에 재판정에서 말했습니다. "부마 사태를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부마 항쟁이 박정희를 직접 죽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유신 체제의 심장을 멈춘 것은 분명 부마 항쟁이었습니다. 시민들의 함성이 독재자를 흔들었고, 그 균열이 결국 총성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끝나지 않은 민주화의 여정
부마 항쟁은 4·19 혁명과 6월 항쟁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1960년 학생들이 독재에 저항했고, 1979년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그 정신을 이어받았고, 1987년 전국의 시민들이 마침내 민주화를 쟁취했습니다.
2023년, 부마민주항쟁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늦었지만 역사는 그들의 용기를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최루탄 연기 속에서 "유신 철폐"를 외쳤던 시민들, 탱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사람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가능했습니다.
부마 항쟁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독재가 다시 고개를 들 때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역사는 반복됩니다. 하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음 화 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총칼로 짓밟힌 민주주의, 그러나 꺾이지 않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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